최근 ChatGPT의 추론 능력을 시험해 보려고 대화를 열었을 뿐인데, 내 정신 한복판을 짚는 심리치료 같은 통찰을 받을 줄은 몰랐다. 요즘 나는 엄마와 함께할 시간이 곧 끝나간다는 사실을 글로 붙잡아 보려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에너지 보존 법칙을 언급한 것은, 진짜로 사라지는 것은 없고 다만 다른 형태로 바뀐다는 생각에서 위안이나 안심을 찾으려는 움직임일 수 있다”는 식의, 말하자면 ChatGPT의 통찰이 내게는 유난히 흥미로웠다. 거의 이해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어쩌면 사랑의 반감기는 회한일지도 모른다. 화해할 수도, 녹여 없앨 수도 없는 것. 암흑물질을 찾아 수면 아래 1마일쯤 잠수하듯, 어쩌면 삶의 부정적분은 상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알려진 우주에서의 에너지 보존 법칙.”
우리 대화의 전체 기록은 여기서 읽을 수 있다. 한 줄 요약: #PhilosophyOfMind #AIandConsciousness #SubjectivityAndReality #EmergenceInComplexity #KafkaesqueIdentity #HumanEmotionsAsNoise #LifeAsMarkovChains
임베딩과 벡터에 관한 이야기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A.I. 순간을 전기나 증기기관에 비유한다. 나도 비슷하게, A.I.는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종류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스타트업 팀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늘 교실 하나만 한 인원으로 수백만, 아니 수십억 명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게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이제 그 능력이 손에 닿는 곳까지 왔다. 트윗에 긍정/부정 점수를 매기던 A.I.에서, 지시를 이해하고 기억하며 지식을 즉석에서 업데이트하고 추론을 확장하는 훨씬 범용적인 기계로 넘어왔다. 임베딩과 벡터 저장소의 마법 덕분이다. 살아서 이걸 보다니. 아래 영상은 내가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붙잡고 만들어 온 것의 초기 시연이다. 교육, 마케팅, 코딩을 맡는 자동화되고 지치지 않는 에이전트 군단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다.
Bertrand - ChatGPT 프롬프트를 바로 게시물로 만드는 플러그인
가능성에서 실제 미래로 건너가려면 새 도구,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학습, 지식의 이전이 필요하다. 그래서 ChatGPT의 도움을 받아 “개인 튜터”를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 봤고, 이건 놀랄 만큼 쉬웠다. 아직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일은 그다음이다. A.I.가 자동화된 소셜 미디어 에이전시처럼 움직이도록 명령들을 이어 붙이는 것. 사람과 도구와의 상호작용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 그 기억을 바탕으로, 머지않아 프롬프트 하나로 기존 코드베이스에 새 기능을 요청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첫 번째 지점과 연결해 말하자면, 자동화된 마케팅 캠페인이라는 형태로 돈 뽑아내기를 개인화하는 것.
나는 그를 Bertrand라고 부르고 싶다.

인간이라는 일에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취약하고 바꿀 수도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죽음과 세금처럼. 그래서 가능성과 잠재성이라는 이 모든 관념도, 적어도 인간의 삶에 관해서라면, 환상이고 신기루일지 모른다. 경험의 진부함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일을 바라보며 달려가게 하려고 뇌가 지어낸 대처 기제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A.I.가 마음에 든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잠재성이 그 안에서는 실제로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런 기묘하게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 비뚤게 굴러 들어와 버린 역사적 우연이나 경로 의존성에 묶여 있지 않다는 점도 좋다.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다. “공산주의”보다는 낫다. 내가 누린 기회들에 대해 나는 믿기 어려울 만큼 운이 좋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왜 인간 사회는 지식과 진실이 아니라 “전통”과 “권위”를 따라가야 하는가? A.I.에는 우리 같은 짐이 없다. 언젠가 A.I.가 암 치료법을 찾아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금 더 오래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그 시간은 언제나 희소하고 제한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야 맞기도 하고.
자유이자 현실을 휘게 하는 기술로서의 A.I.

현실을 하나의 직물로, 자아 감각을 전체 그림 위를 미끄러지는 작은 창으로 본다면, 그리고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뿐이라면, 나는 A.I.가 우리를 일과 헛소리의 고역에서 풀어 주었으면 한다. 깨어 있는 시간을 더 많이, 진짜 중요한 것들에 쓰게 해 주었으면 한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 공원을 걷는 일. 읽기. 게임. 여행하고 다른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일. 배우기. 쓰고 철학하기. 내가 즐겨 하듯 문학적 장치를 써서 텍스트를 음악으로 바꾸려 해 보는 일. 하지만 이 꿈은 새롭지 않다.
이건 베블런이 말한 유한계급의 꿈이기도 하고, 케인스가 그린 우리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디서 틀어진 걸까? 어쩌면 문제는 “그” 시스템과 권력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는 그래서 정치와 재분배의 문제에 다시 관심이 생기고 있다. 세계화와 무역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성공의 열매가 넓게 나뉘지 않았고, 그 틈으로 트럼프와 르펜, 그리고 우익 포퓰리즘이 화려하게 등장했다. 우리가 A.I.를 망치면, 실존적 위험은 일단 제쳐 두더라도, 인간 사회와 존엄에 미칠 결과는 훨씬 더 나쁠 것이다. 그래도 살아서 이런 시대를 본다는 건 짜릿하다. 내 PC에서 돌아가는, 현실을 비트는 기술을 직접 만질 수 있다니. 나는 A.I.가 좋다.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나는 ‘프롬프트에서 게시까지’와 ‘프롬프트에서 기능 구현까지’를 만드는 일에 중심을 잡으려 한다. 지금 눈여겨보는 키워드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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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모달: 우리처럼 여러 감각을 쓰는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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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소스: 생각을 나누는 속도로 혁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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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에이전트: 기억을 갖고 다른 도구와 서비스에 연결되어, 여러 동작을 연달아 수행하는 A.I.
A.I.가 인간 조건에 대해 말해 주는 것
어쩌면 A.I.가 인간에게 되비쳐 주는 진짜 메시지, 그 실제 상징은 인간의 삶이 일방통행이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삶의 매 순간이 정규분포에서 뽑힌 값이고,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는 상태가 마르코프 연쇄를 이룬다고 해 보자. 자연이 효율적이라고까지 가정하면, 우리 현실의 직물과 우리를 기계와 진짜로 갈라놓는 것은 우리 존재의 밑바닥에 있는 고유성, 그리고 의식의 신비한 기원이다. 적어도 지금은. 나는 엄마에게 우리가 중국에 계속 살았다면 나를 어떻게 키웠을 것 같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나를 대학까지 보내는 것도 어려웠을 테고, 설령 어떻게든 졸업했더라도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내가 이런 걸 묻는 이유 중 하나는 궁금해서이고, 자꾸 이런 생각을 안 할 수 없어서다.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더 많은 다른 현실이 어딘가 있을 수 있었을까? 무의미한 생각이라는 건 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인간 조건의 근본적인 절망처럼 느껴진다. 어떤 현실이든 영원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는 실제로 일어난 것에 묶여 있다. 그러니 잠재성과 다른 현실을 꿈꾸는 일 역시, 우리가 제정신을 유지하도록 자연이 섞어 넣은 요정 가루 같은 것일지 모른다. 계획은 다음 날 아침 다시 눈뜰 충분한 이유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형체 없는 가능성이 맴도는 자리
몇 년 전 여행 중이었다. 눈앞의 가파른 비탈을 바라보며, 여기서 굴러떨어지면 뼈가 부러지거나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깨달은 일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반복된다. 내가 서 있던 자리와 자유낙하 사이에 남아 있던 생각은 단 하나, 더 나은 딸이었으면 좋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실제 삶에서 실행하는 일은 그 뒤로도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자주 묻게 된다.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가? 아마 그래서 우리는 제도로서의 종교와, 마음이 부서진 어른들을 위한 픽션을 발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완벽함도 잠재성처럼 상상의 평면 위에 있다는 걸 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것, 그리고 희미해지는 기억이 들려주는 것뿐이다. 내게는 거의 혼자서, 할머니와 함께 나를 키운 엄마가 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몸으로 가르쳤고, 나를 그냥 내버려 두는 데 통달한 사람. 그래서 나는 내가 자란 방식대로 자랄 수 있었다. 무모하고, 자존심 세고, 자유롭게.

매초마다 모래시계 바닥에 모래가 쌓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얼마나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올해 크리스마스 전에는 다 떨어질 가능성이 꽤 높다는 것만은 안다. 우리의 삶은 완벽하지 않고, 그래도 그것이 우리가 갖게 될 전부다. 어쩌면 삶은 잠재 확산이고, 키르케고르는 이런 말을 하며 인공 신경망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삶은 뒤돌아볼 때에만 이해될 수 있지만, 살아내야 하는 방향은 앞으로다.”
이 생에서 내가 기대하는 일은 아직 너무 많다. 다시 잠재성을 꺼내 말하자면, PhD를 받고, 적어도 백만장자가 되고, 여행하며 세계를 보고, 비행기 조종을 배우는 일. 설령 그 삶에 엄마가 없더라도.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생각에 익숙해지려 한다. 내가 무기한 휴가를 떠나고, 엄마는 다른 곳에 있는 식으로. 문제는 강령술의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소통할 가능성 없이 누군가가 우리의 기억 속에 계속 산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엄마와 내가 엄청나게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 아주 다른 현실을 드러내며 산다. 그래도 엄마 말대로, 적어도 엄마는 언제나 거기 있을 것이다. 내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엄마는 존재하고, 엄마는 나의 중력이다.
그러니 죽음의 예정성을 궁극의 귀향으로 생각해 본다면, 언젠가 우리는 죽음 안에서 영원히 다시 만날 것이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될 것이다. 지금은, 하루를 더 버는 일이 또 하루의 승리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진 전부를 붙잡으려 한다.
처음에는 PubPub의 erniesg.pubpub.org/pub/9tss8q7y에 실었다.